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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사찰탐방 제1편

전라남도 강진 여행기
등록날짜 [ 2015년12월18일 12시43분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12일

전남 강진군 사찰 탐방

- 제 1편 -

 

 

 

 

강진 월남사지

 

▲ 옛 부흥이 떠나간 자리, 초라한 월남사  불심은 변함이 없으리라.

 

▲ 많은 고찰을 품고 있는 월출산 월남사지로

향하는 길목에서 본 전경

신라계 석탑의 흔적을 찾아 강진 월남사지로 향한다. 월출산 경포대 아래에 자리 잡은 월남사지는 고려시대 대형 금동풍탁(풍경), 다량의 백제 기와 등이 출토되면서 백제 절터가 확인되었고현재 한참 발굴조사 중이다.

 

월남사지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던 고려 시대의 대규모 사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월남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할 뿐 이후 언제, 어떻게, 왜 절이 없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현재 월남사지에는 백제계 양식의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월남사지 주변으로는 외곽 담장의 흔적이 보이며 주변 민가에는 사찰의 탑재나 건물 기단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곳곳에 남아 있어 광대했던 월남사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눈여겨볼 것은 월남사지를 포근히 감싸 안고 장대하게 펼쳐진 월출산 남쪽 전경의 평온한 아름다움이다. 우아한 자태의 삼층석탑에 전해오는 석공과 그의 아내와의 사무치는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에 발길이 머물고 월남사지 특유의 여운이 깃든 고요한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는 이곳만의 매력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제298호)

 

 

▲ 사지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는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위엄

 

 

월남사지 삼층석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삼층석탑은 월남사 법당이 있던 터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있다. 이 탑이 있는 곳이 백제의 옛 땅이었으므로 이 석탑은 백제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 지붕돌이 목탑의 경우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하다. 이 탑은 백제의 대표적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과 규모나 양식적인 면에서 비교할 만큼 한국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주변 민가에서 또 다른 석탑의 지붕돌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월남사지에는 삼층석탑 외에도 1기의 석탑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월남사지 삼층 석탑을 조각하게 된 석공에게는 아름답고 젊은 아내가 있었다. 석공은 아내를 멀리 떠나는 일이 안타까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아내에게 "탑을 완성하고 돌아오는 날까지 절대로 나를 찾지 마시오" 라고 이르고 월남사로 떠났다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자, 아내는 남편이 너무나 보고 싶어 몰래 월남사로 찾아갔다. 먼발치에서 석탑을 쪼는 데에 열중한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는 그냥 돌아가기가 너무나 아쉬워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러보았다.

 

혼잣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벼락이 치며 석탑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아내는 돌로 변해 버렸다. 석공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어루만졌지만, 아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석탑을 만들어야 했지만, 인근에 쓸 만한 돌이 없었다. 석공은 생각 끝에 돌로 변한 아내를 옮겨 눈물로 이 석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

 

 

▲ 동백나무 사이 보호각이 자리 잡고 있다.

 

월남사지 초입 도로변에 있는 진각국사비는 동백숲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국사비와 삼층석탑의 거리가 먼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월남사지의 규모가 대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진각국사비는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고려 고종 37(1250)에 세워졌다. 진각국사의 속세의 성은 최 씨이고, 법명은 해심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문하에서 선학을 닦았고, 송광사 16국사 중 제2조인 고승이다. 비의 몸돌 전면은 떨어져 나간 상태이지만 후면에는 기록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한편, 전면에 떨어져 나간 비석 일부가 1972년에 비 주변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12월 초 진각국사비 주변 동백나무가 땅에서 피어나고 있다.

 

전면의 비문은 이규보가 지었고, 글씨는 김호인이 썼다. 후면의 비문은 최자가 지었고, 글씨는 탁연이 썼다. 머릿돌과 몸돌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받침돌은 남아 있는 상태이다. 특히, 거북 받침돌은 역동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고려 후기의 미술사적 특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강진의 향기

'강진 다향'을 만나다

 

 

▲ 월출산국립공원 야영장 방향 전경

 

월출산 자락 월남사지에서 무의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녹차밭을 만나게 된다. 호남의 소금강 월출산 남쪽 기슭에 드넓게 펼쳐진 강진 다원이 바로 그것. 이곳은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많아 녹차 생산지로 적당한 조건이라 녹차 특유의 떫은맛이 적고 향이 강하다. 강진 녹차밭은 광복 직전까지 국내 최초 녹차 상품으로 알려진 '백운옥관차'를 생산하던 곳으로, 태평양의 계열사인 장원산업에서 1980년부터 산지를 개간하여 약 10만 평의 다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월출산 설록다원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차를 마시고 학문의 깊이를 더했던 곳이자 초의선사를 통해 다신전을 집필하였던 곳이다. 현재 강진에서 생산되는 찻잎은 1979우리 자문화 부흥을 위해 설록차를 탄생시켰으며, 제주와 강진 월출산에서 생산되는 찻잎이 국내 차 문화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불교 벽화의 보고 '무위사(無爲寺)'

 

 

대한불교 조계종 월출산 무위사를 찾아 나선다. 천년고찰 관음 기도 도량 무위사는 월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617) 원효가 관음사를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 헌강왕 1(875) 도선국사가 갈옥사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정종 1(946) 선각에 의해 모옥사로 불리다가 명종 5(1550) 태감이 무위사로 부르면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무위사는 23동의 당우와 부속암자 35곳을 거느리던 대찰로 알려져 있다.

 

 

▲ 예전에는 없었던 일주문이 자리하고 있다.

 

월출산 무위사 현판이 내걸린 일주문을 시작으로 사천왕문을 거쳐 누각을 오르면 비로소 대웅보전에 도착한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노거수와 함께 독특한 가로 형식의 극락보전 현판이 내걸린 절집을 만난다.

 

화려한 채색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작고 아담한 절집 앞에는 양쪽 2기의 당간지주와 중앙에 연당 무늬를 한 네모 반듯한 배래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왼편으로는 삼층석탑을 두고 있다.

 

무위사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무위사 사적에 의하면 무위사는 원효스님에 의해 창건되고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무위사의 역사는 선각대사 형미스님이 중창한 1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위사는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로 유명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수육사로서 유명하였다.

 

극락보전(국보 13)은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를 행했던 사찰이었던 만큼 중심 건물에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극락보전으로, 우리나라 조선 시대 불교 건축물 중에서도 초기 형태에 속한다. 눈여겨볼 것은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진 극락보전의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이다특히 극락보전 측면의 기둥과 보가 만나 이루는 공간 분할의 절제된 아름다움은 놓쳐서는 안 될 감상 포인트이다. 또한, 단정하고 검소한 극락보전의 겉모습과는 달리 서방 정토의 극락세계를 묘사한 화려한 건물 내부는 물론, 조선 초기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불상과 불화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무위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13)

 

 

 

▲ 극락보전(국보 제13호)

 

무위사 내 가장 오래된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조선 초기 주심포식 건물로, 성종7(1476) 또는 세종 12(143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극락보전 내에는 29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지만, 현재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뒤 아미타삼존도를 제외하고는 전시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이곳 벽화는 탱화로 그려 내건 것이 아닌 모두 토벽(土壁)의 붙박이 벽화로 고려 불화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일주문을 시작으로 보제루를 지나면 비로소 극락보전을 마주하게 된다. 옛 건물과 최근 신축한 건물의 조화가 조금은 부자연스럽다.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 내벽사면벽화(보물 제1315) 등 불화가 모셔져 있다. 극락보전은 무위사의 대표 건물이면서 조선시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된 극락보전의 외부 모습은 소박한 듯 단아하지만, 대신 내부를 불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불교의 극락세계를 표현하였다.’

 

▲ 독특한 디자인의 극락보전 현판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에 관한 안내글은 다음과 같다.

 

극락보전의 주불인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아미타여래상은 흙으로 만들어진 데 반해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중앙의 아미타여래상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를 지닌 결가부좌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좌측의 관음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쓴 채 왼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우측의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쓴 채 오른쪽 다리를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비슷한 시기인 1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불교 미술양식이 결합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조선 초기 불상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 (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2)은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좌상으로 중심불인 아미타불상, 왼편으로 관음보살상, 오른편으로 지장보살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후기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무위사 극락전 백의 관음도(보물 제1314호)

 

극락보전 뒤편에 그려져 있는 조선시대 작품 '백의 관음보살'상 벽화이다.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는 파도 위 하얀 옷을 입고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 관음보살상이다.

 

 

▲ 화려한 색체 기교가 보이지 않는 극락보전

 

극락보전 벽화는 극락전을 만든 후 한 노인이 찾아와 49일 동안 법당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들어갔는데, 49일째 되던 날 주지스님이 참지 못하고 문에 구멍을 내어 몰래 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다 인기척에 놀라 날아가 버려 오늘날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전북 부안 내소사의 목침 전설과 거의 유사한 전설이다.

 

극락보전 내 파랑새 전설과 함께 그려져 있던 29점의 불화 중 28점을 해체하여 따로 보관 전시하고 있다. 극락보전 동쪽 벽 중앙의 삼존불화를 시작으로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 주악비천도 6, 연화당초향로도 7, 보상모란문도 5, 당초문도 1, 입불도 1점 등이다. 방문 당일 박물관은 입장할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극락보전 내 중심불인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 뒤편에 그려져 있는 후불벽화이다. 무위사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로 지정되어 있던 후불벽화는 20090902일 국보 제313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무위사 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

 

 

▲ 무위사 삼층석탑

  

무위사 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은 높이 396cm 삼층석탑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2층 기단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 등을 잘 갖춘 삼층석탑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 1석씩 구성되었으며, 몸돌에는 양면에 모서리 기둥이 모각되었다. 2~3층 몸돌 높이를 급격하게 줄여 탑의 체감률이 높다.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을 띄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탑의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 탑비와 비슷한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탑비 (보물 제507)

 

 

▲ 귀면상을 닮은 거북머리

 

무위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1기의 탑비가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탑비는 선각대사 입적 28년 후에 세우고 '편광영탑'이라 불렀다. 무위사 선각대사 탑비는 비 받침, 비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것으로 해당 부분의 우수한 조각수법을 통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위사 선각대사 탑비는 보물 제507호이자 높이 250cm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형미스님(864-917)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기의 명승으로, 무위사에서 주지로 8년간 머무르며 무위사 중창을 주도하였다. 탑비는 거북 받침돌과 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거북 받침돌과 운용문이 있는 머릿돌에 표현된 조각 수법은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몸돌 앞면에는 형미스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글씨를 썼다.’

 

 

 

 

무위사에서 만날 수 있는 불교유적으로는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 삼존 벽화(국보 제313), 무위사 선각대사 탑비(보물 제507), 무위사 아미타여래 삼존 좌상(보물 제1312),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 무위사 극락보전 내벽 사면벽화(보물 제1315), 무위사 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 등이 있다.

 

  

 

영랑생가 (김윤식1903-1950)

 

 

 

▲ 영랑생가 입구 전경

 

영암군청 옆 골목길로 접어든다. 참 오랜만에 찾은 영랑생가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중요민속자료 제252호 강진 영랑생가(康津永郞生家)는 김영랑(金永郞, 19031950)의 생가로 본채와 사랑채, 문간채와 함께 정원에는 동백나무와 모란밭이 있다.

 

본채 건물은 1906, 사랑채는 1930년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김영랑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김영랑은 80여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19344월 문학 3호에 발표한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시가 입구에 새겨져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안채

▲ 사랑채

 

 

 

 

영랑 김윤식(1903-1950)은 강진 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휘문의숙에 들어갔고 3학년이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 만세운동(강진 4.4운동)을 준비하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감금되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관동대지진이 나던 해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를 그만두고 귀국하여 1930시문학지를 창간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1943년 서울로 옮겨 이승만 정권 당시 공보처 출판 국장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부상당해 47세가 되던 195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008년 국가에서 금관 문학훈장을 추서하였다.

 

 

 

주막 사의재(四宜齋)

 

 

▲ 사의재 내 동천정

 

영랑생가에서 조금 더 진입하면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거처하던 곳을 만난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 길에 올라 1801년부터 1804년까지 머물다 도암면 귤동마을로 옮기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 주막 내 기거했던 곳. 사의재 간판이 내걸려 있다.

 

정약용의 사의재기에는 사의재가 '강진 귀향시절 거처하던 집'이라고 기록하며, 머물던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강진 유배 길에서 정약용의 신분이 대역죄인이라 혹시 모를 피해를 우려하여 다들 멀리하였는데, 당시 오갈 데 없는 처지를 아는 동문매반가의 주모가 골방 하나를 내준 곳으로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 등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사의재는 처음에 동쪽 마당에 샘이 보인다는 의미로 '동천여사'라 불렀다 한다.

 

 

 

▲ 사의재 옆 한옥체험관 내 주모 상

 

오늘날 주막으로 보존하는 곳으로 음식도 판매하며, 2007년 복원한 독특한 우물이 시선을 붙잡는 곳이기도 하다. 주막 동문매반가는 '동문에 있는 밥을 파는 곳'이란 의미이다. 주막에는 다산 선생이 만든 소박한 정원인 연못이 있으며 이를 '동천정(東泉亭)'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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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호 작가

http://blog.daum.net/okg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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